1. 제갈량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이 량(亮)이고 시호는 충무(忠武) 또는 무후(武侯)이다. 전한(前漢) 말 낭야(瑯邪)에서 태어났다. 제갈공명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동생 균을 낳고 얼마 후 제갈공명이 9세 되는 해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도 제갈공명이 1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
1. 제갈량은?
제갈공명(181~234)은 이름이 량(亮)이고 시호는 충무(忠武) 또는 무후(武侯)이다. 전한(前漢) 말 낭야(瑯邪)에서 태어났다. 제갈공명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평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동생 균을 낳고 얼마 후 제갈공명이 9세 되는 해에 별세하였고, 아버지도 제갈공명이 14세 되던 해에 세상을
범상함의 수준을 넘는 인재들이 있다. 천재는 그중 가장 탁월한 사람으로, 이름 그대로 하늘이 준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이를 일컫는다. 하지만 천재라고 하여 모두다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진 못한다. 아니, 대부분이 못한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다음 수재와 영재는 천재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 하지만
동기
음식은 사람의 생활과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 하나이다. 중국의 지역연구를 위해서 생각해 보면서 중국 내에서 우리나라와 가장 비슷한 입맛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사천을 사천요리를 중심으로 조사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 조는 사천의 지리와 환경
조조는 다섯 번 창패를 공격했으나 떨어뜨리지 못했고, 네 번 소호를 건넜으나 공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이복을 써보았으나 이복이 오히려 뺏어버렸고, 하후에게 맡겼으나 하후는 패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선제께서는 매양 조조가 능력 있다고 추키셨으나 오히려 그같은 실패가 있었는데 하물며 신
Ⅰ융중대책의 실현안 : 북벌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사위지기자사’라는 말이 있다. 이는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뜻이다. 이 말처럼 ‘삼고의 예’로 자신을 알아준 유비(161-223)에게 보인 제갈량(181-234)의 충심은 그 믿음에 대한 보답을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제
아버지 고양동씨였는데, 해방 전 일본 오사카의 한 스테인레스 공장에서 일하면서 노조위원장을 지내다가 구속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결혼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자를 지으며 틈틈이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고정희의 시적활동은 그가 19세 되던 해인 1967년 <새농민>지
제갈량(181~234)은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모신(謨臣)입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백부(伯父)인 제갈현(諸葛玄) 슬하에서 자랐으나 백부(伯父)가 전란을 피해 형주목(荊州牧:형주의 도지사) 유표에게 의탁하였기 때문에 그도 형주에 살다가, 백부(伯父)가 죽은 후 10년간 양양성 서쪽 융중에 은거하여
1 . 들어가며
삼국지 속에서는 끝없는 전투가 벌어진다. 그들은 언제나 전투에서 만남을 가지고 원수가 되고 전우가 된다. 제갈량 역시 전투에서 많은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강유와 같은 아군을 만나기도 하고, 그리고 주유나 노숙 같은 동지였지만 원수였던 사이들, 그리고 일생의 라이벌 사마의를